뉴욕 맨해튼의 지도를 펼쳐 들면 정교하게 구획된 격자형 도로망(Grid System)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거대한 도시 계획의 초석이 된 1811년 ‘위원회의 계획(Commissioners’ Plan)’은 오늘날 맨해튼을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밀어 올린 위대한 설계도였다. 당시 설계자들은 대부분의 동서 횡단 도로를 60피트(약 18미터) 너비로 제한했으나, 도시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할 소수의 핵심 축들은 100피트(약 30미터) 너비로 대폭 확장하여 구획했다. 이 특별한 15개의 횡단 도로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어퍼 웨스트 사이드(Upper West Side, UWS)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72가(72nd Street)이다.
![[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Source: New York and New Jersey, DB Ban]](https://cdn.sanity.io/images/t2udvi7n/production/a2369fcfcfbf1f2e2976a8cfc3570889cb83c4a4-1182x666.jpg?w=1100&q=75&fit=max&auto=format)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맨해튼의 서북쪽 지역은 농장과 야산이 뒤엉킨 도심 변두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 8번가와 9번가를 따라 고가 철도가 북쪽으로 연장되고, 조경 건축의 거장 프리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의 지휘 아래 허드슨 강변을 따라 ‘리버사이드 파크(Riverside Park)’가 조성되면서 어퍼 웨스트 사이드는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밀도로 밀집되어 가던 기존 이스트 사이드의 대안으로 떠오른 이 지역은 넓은 도로와 쾌적한 강바람, 그리고 도시적 낙관주의가 결합된 새로운 고급 주거지로 급부상했다. 그 변화의 최전선에 100피트 너비의 광활한 도로폭을 자랑하던 72가가 있었다.
다코타에서 앤소니아까지, 프리워 아키텍처가 박제한 뉴욕의 황금기
어퍼 웨스트 사이드 72가를 상징하는 가장 거대한 유산은 단연 건축이다. 72가와 센트럴 파크 웨스트(Central Park West)가 만나는 모퉁이에 서면, 이 지역의 영혼이라 불리는 다코타 아파트(The Dakota, 1884년 완공)가 고풍스러운 자태로 내려다본다. 건축가 헨리 하든버그(Henry Hardenbergh)가 설계한 이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은 뉴욕의 상류층에게 ‘아파트 공간 역시 최고급 명품 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대전환을 선사했다. 완공 당시만 해도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마치 미국의 고립된 영토인 ‘다코타’ 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 건물은 곧 뉴욕의 부호들과 문화 예술인들을 끌어당기는 보헤미안 매력의 상징이 되었다.
![[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Source: New York and New Jersey, DB Ban]](https://cdn.sanity.io/images/t2udvi7n/production/68540be0d5d0f2388ebe04323a3ee1d6fa342be1-666x1182.jpg?w=760&q=75&fit=max&auto=format)
72가를 따라 브로드웨이 방향으로 서쪽으로 걸어가면 또 다른 건축적 기적인 앤소니아 빌딩(The Ansonia)과 마주하게 된다. 보자르(Beaux-Arts) 양식의 화려한 파사드와 웅장한 돔을 자랑하는 이 건축물은 20세기 초 뉴욕의 황금기를 그대로 박제해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1930년대를 전후해 센트럴 파크 웨스트를 따라 들어선 산 레모(San Remo), 마제스틱(Majestic) 같은 아르데코 양식의 타워들은 어퍼 웨스트 사이드 특유의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스카이라인을 완성했다. 1990년 뉴욕시 역사보존위원회(LPC)가 이 일대 2,000여 개 건물을 ‘역사지구’로 통째로 지정해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72가 주변의 프리워(Pre-war, 2차 세계대전 이전 건축) 빌딩들은 오늘날까지도 뉴욕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Source: New York and New Jersey, DB Ban]](https://cdn.sanity.io/images/t2udvi7n/production/a57126f6d2c8972ef16d3fe530df790576ecfeb2-1182x666.jpg?w=1600&q=75&fit=max&auto=format)
건축이 가진 역사적 가치: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프리워 빌딩들은 단순한 부동산 자산이 아니다. 높은 층고, 정교한 석조 조각, 그리고 두터운 벽체로 대변되는 이 건축물들은 훼손되지 않는 뉴욕의 역사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유산이다.
지성과 예술의 요람, 올드 뉴요커들이 사수하는 보헤미안 정신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가 전통적인 자산가들과 금융 자본의 ‘올드 머니(Old Money)’를 대변한다면, 어퍼 웨스트 사이드, 특히 72가 일대는 지성, 예술, 그리고 진보적 문화의 성지 로 통한다. 20세기 초중반 1차 및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이 지역에 대거 둥지를 틀면서 어퍼 웨스트 사이드만의 독특한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공동체 문화가 뿌리내렸다.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와 줄리아드 음대, 그리고 1960년대에 조성된 ‘링컨 센터(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가 자아내는 문화적 인력거는 이 지역을 맨해튼 내에서 가장 밀도 높은 지식인 사회로 만들었다.
![[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Source: New York and New Jersey, DB Ban]](https://cdn.sanity.io/images/t2udvi7n/production/c3bf746011fc4a4c28ab810d622b9ef386592533-1024x768.jpg?w=1100&q=75&fit=max&auto=format)
이곳의 주민들을 지칭하는 ‘올드 뉴요커(Old New Yorkers)’는 유행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다운타운의 젊은 세대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타임스퀘어의 상업주의와 스스로를 철저히 차별화한다. 그들은 주말이면 동네 서점에 들러 책을 읽고, 72가 지하철역 앞 오래된 벤치에 앉아 이웃과 정치를 논하며,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수십 년 된 골목 상점을 이용하는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1980년 다코타 아파트 앞 부근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존 레논(John Lennon)을 추모하기 위해 센트럴파크 내에 조성된 평화의 정원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는 지금도 전 세계 보헤미안들이 모여 평화를 노래하는 장소이며, 이는 어퍼 웨스트 사이드가 지닌 지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대변하는 단면이다.
두 개의 자연을 잇는 동선, 72가 크로스타운이 품은 뉴욕의 일상 미학
72가가 올드 뉴요커들에게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맨해튼에서 보기 드물게 도시를 둘러싼 두 개의 거대한 자연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가교 이기 때문이다. 72가의 동쪽 끝은 맨해튼의 허파인 센트럴 파크와 맞닿아 있고, 서쪽 끝은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허드슨 강변의 리버사이드 파크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72가는 뉴요커들의 가장 일상적이고 고유한 삶의 동선이 된다. 새벽이면 이 길을 따라 센트럴 파크로 조깅을 나서는 주민들을 볼 수 있으며, 해질 무렵이면 반려견과 함께 리버사이드 파크로 향하는 유동 인구가 거리를 가득 채운다.
![[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Source: New York and New Jersey, DB Ban]](https://cdn.sanity.io/images/t2udvi7n/production/dfb919c8760aa8efbbd8ed373de9bcfaa41d1aa8-1330x2364.jpg?w=760&q=75&fit=max&auto=format)
특히 최근에는 이 72가 크로스타운 축을 따라 센트럴파크와 양측 강변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자전거 전용 도로망 건설 및 보행자 중심의 환경 개선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도심 속 웰빙을 중시하는 올드 뉴요커들의 주거 만족도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80가 인근의 자바스(Zabar’s)나 바니 그린그래스(Barney Greengrass) 같은 수십 년 전통의 레스토랑과 식료품점에서 훈제 연어와 베이글을 사 들고 72가를 걸어 공원으로 향하는 일상은, 외부의 화려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견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해 온 어퍼 웨스트 사이드 주민들만의 특권이자 지키고 싶은 뉴욕의 진짜 얼굴이다.
ⓒ 뉴욕앤뉴저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ew York and New Jersey. Unauthorized reproduction and redistribution are prohibited.

